판소리는 우리 민족에게 3백여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한 사람이 랩처럼 말이나 노래를 하고 또 한 사람은 북이나. 장구로 장단을 맞추어 가며 인생, 사랑, 영웅;해학 등을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문화가 융성하며 사람들의 감정표출구가 필요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판소리인 것이다.
1.판소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판소리가 무속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은 가장 유력한 학설 중 하나입니다. 무속에서 부르는 긴 서사적인 내용의 무가와 판소리의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점에서 이러한 추측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판소리의 장단과 선율이 무속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며, 무당의 춤과 판소리의 제스처 또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당이 알듯 모를 듯 흥얼거리며 춤을 추면 옆에 있는 남편도 함께 따라 하다가 박수를 쳐서 장단을 맞추었다. 이후 굿이 진행됨에 따라 남편은 앉아서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굿을 지켜보고 있던 향반(시골의 몰락한 양반, 농민과 비슷한 처지. 그러나 동네 주도권을 갖고 있음) 자제가 이러한 장단에 맞춰 곡을 만들고 적당한 가사를 붙여 공연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반응이 상당하였다. 이들은 2인 1조를 만들어 지역을 돌며 판을 벌이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리 내용에 공감하고 자발적으로 돈도 주고 물건도 갖다 주는 것이었다. 이를 본 해당지역 향반자제들은 판이 끝나고 근처 주막에서 공연자를 초대하여 식사나 술을 하며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했으며 어떤 식으로 하는지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았다. 이에 흥미를 느낀 끼가 다분한 향반자제가 자기도 한번 따라다니며 해보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니 그럼 한번 해보자며 의기 투합하여 그 자리에서 흥이 올라 한판 더 어울려 놀았다.
집에 돌아간 향반자제는 부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자 부모는 난리를 치며 내가 너를 그렇게 안키웠는데 무슨 소리냐며 한바탕 집안 소동이 났다. 그러나 판소리에 꽂힌 자제는 그다음 날로 집을 나와 어제 그 주막에 들러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난다. 이러한 과정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되풀이되면서 계속 이 업에 종사하는 이는 각 지역을 돌며 소리판을 벌이고 중간에 그만 작파한 이들도 생겨났다. 재능은 있으나 경제사정, 가정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제 실력을 아쉬워하며 하루 이틀 지내다가 무료함을 달래려고 판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노랫가락을 읊으며 혼자 막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소리를 하다 보니 더 좋은 가락 더 좋은 가사 내용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는 잊을세라 얼른 종이에 글을 쓰고 고치고 하여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멋진 한 편의 곡을 만드니 이것이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판소리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판소리 다섯마당
한편 각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던 사람들은 한 가지 곡으로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어렵고 자신들 또한 싫증을 느낄 때 즈음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주워들은 각 지역의 전설, 설화, 옛이야기 등을 취합하여 여기에 가락을 붙이고 가사를 첨언하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등 12곡을 만들어 판소리를 벌이니 여기저기에서 요즘 말로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누구는 갑부어른 환갑잔치에, 자식 생일잔치에, 사또 부임 시. 과거 시험 합격 잔치, 노인 위로 공연 등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곤 하였다. 나중에 이사실이 임금님 귀에 까지 들어가니 국가 행사에도 참여하여 실력을 발휘하며 인기가 대단하였다. 어느 날은 청나라의 사신이 왔다고 임금이 여흥을 베풀어 주었는데 여기에서도 판소리공연을 하였다. 이 공연을 본 청나라 사신은 청국에 돌아가서 판소리 공연을 보았노라고 자랑하였다. 특히 흥부가와 춘향가가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듣고 있던 왕창연이 다음 조선 사신으로는 자신이 가겠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게 비행기가 없던 시절 마차나 걸어서 국가 간 이동했을 때 나타났던 K팝의 원조이다
3. 동편제, 서편제, 중편제
한편 향촌에 머물며 농사를 지으며 동네행사 시 공연을 맡아하던 아까 주저앉았던 명창들 귀에도 한양에 명창들이 생겨나고 임금님 앞에서 판소리도 한다는 풍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전남 보성에 사는 아까 그 향반자제가 상경하여 이들과 오랜만에 만나 주막에서 한잔 하며 말을 들어보니 춘향가. 심청가등에 관해 말을 하는 것이다. 향반자제였던 보성양반은 이 말에 귀가 번뜩여서 그날 술값을 모조리 계산할 테니 춘향가, 심청가 대본을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보성고향으로 돌아와 몇 날며칠 밤을 새워 대본을 공부한 후 판소리 공연을 해보니 반응이 상당히 좋긴 한데 어째 감정이 팍팍 녹아드는 맛이 부족함을 관객도 느끼고 본인이 더 느끼는 지라 집에 돌아가 대본을 펼쳐놓고 자세히 보니 경기도 지방말과 분위기로 씐 것을 알아차리고 보성인근 지역에서 통용되던 언어와 분위기로 대본을 몇 날며칠을 각색한 후 옆동네 서당 훈장님 환갑잔치에서 판을 벌여 심청가를 공연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콧물이 빗물이 되어 목포 앞바다까지 흐르고 , 눈물이 하천으로 흘러 경상도 하동으로. 눈 뜬 기쁨의 탄성이 충청도까지 들릴 정도로 난리가 아니었다. 이 보성양반은 심봉사 눈뜨는 대목 "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아버지 눈을 떠서 어서어서 나를 보옵소서 " 대목을 --> 워메 어찌까~ 긍께 시방까지 눈을 못 떠불었단말이요 아부지 얼른 눈을 떠가꼬 여그를 봐보랑께요~ " 이렇게 고친 것이었다. 충정도의 한밭자제도 한양으로 가서 국밥과 막걸리를 사고 대본을 가져와 이 대목을 --> 뭐여 ㅜㅜ ~ 여적 눈을 못 뜬겨~~ 아부지~~ 퍼뜩 눈 떠서 날 봐보라니까유~~ 로, 남원양반은 --> " 시상에 시방까지 눈 못 떴다요 여 먼일이여 아부지 피잉 눈을 떠보시랑게요" 로 각색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역 특색에 맞게 서편제(전라도서쪽),중편제(경기,충청) ,동편제(전라도 동쪽)로 자리 매김한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나라 판소리의 탄생과 분화과정을 알아보았다. 제 나름의 추론이므로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는 독특한 우리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이므로 잘 계승하여 우리문화를 창조 발전시켜야합니다. 감사합니다